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1부 3 中-

 

김춘수는 “내 시에는 가끔 이런 따위 철을 어긴 장면들이 나온다.”며, 그것은 “댓살 났을 때의 유치원 시절의 체험이 불쑥불쑥 되살아났기”때문이라고 말한다.

천석꾼 집 도련님이었던 김춘수가 어린시절 머슴의 등에 업혀 다녔던 진명유치원은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이 세운 통영 최초의 유치원이었다. 어린 김춘수는 호주 선교사들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를 일찍 알았다.

1919년 3월 13일, 통영 장날 벌어진 만세운동도 진명유치원 교사들이 앞장서 시작됐다.

경성에서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진평헌을 중심으로 통영의 젊은이들은 3월 13일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돼 9명이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은 통영만세운동의 기를 꺾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시작해 들불처럼 만세운동이 번져나가던 때, 통영은 태극기도 독립선언서도 지도자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 일어선 이가 진명유치원의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 선생이다. 이 세 처녀 선생은 3월 13일 통영 장날, 장터에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통영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뒤덮였고, 일본 경찰은 주동자를 찾아 무력으로 검거했다. 세 처녀 선생은 부산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들의 뒤를 이어 진명유치원의 교사가 된 이들이 공덕귀, 최덕지, 권재순 선생이다. 권재순 선생은 청마 유치환 선생과 결혼했는데, 이 결혼식에서 화동을 한 제자 아이가 바로 일곱 살이었던 김춘수 시인이다.

훗날 대한민국의 4대 윤보선 대통령의 영부인이 된 공덕귀 여사는 청와대를 나온 다음에 인권운동가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 바탕에는 기독교 신앙과 호주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

통영 최초의 여사 목사인 최덕지는 1901년 통영 서호동에서 통영갓을 만드는 장인의 딸로 태어났다. 12세인 1912년에 진명학원에 입학해 통영의 호주 선교사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그녀는 1919년에 진명유치원 교사로 부임했다. 1920년에 결혼했지만 4년 만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어 일찍 과부가 됐다.

최덕지는 신앙으로 그 슬픔을 극복하고 통영부인회를 설립해 야학을 개설하는 한편, 애국부인회의 총무를 하며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보냈다.

“최선생, 평양에는 여자신학교가 있어요. 거기 가서 공부해 볼래요?”

진명학교의 스키너 교장은 최덕지의 신앙과 용기를 높이 사 목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여성 최초의 목사가 된 최덕지는 끝까지 일제에 항거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됐다. 해방도 평양형무소에서 맞았으니, 기개가 남다른 통영 여성이었다.

이들의 정신적 바탕에 있었던 것이 바로 통영의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호주 선교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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